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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듬떠듬/그저

KINO를 보내며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백화점 비디오 매장 딸래미 신분으로 인해
어릴적부터 영화며 비디오며 접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었다

중학교에 들면서 내가 보고싶은 영화를 찾아보게 되고..
영화 잡지라는걸 접하면서 스크린.로드쇼가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
KINO라는 색다른 잡지한권이 나타났다

뭔가 다른 그 잡지에 매력을 느끼고 보게되고 찾게되고..
KINO 나왔어요 하면서 서점에 매일을 들락거리고..
영화를 너무 어렵게 보게 만드는 KINO적 방식을 언니와 함께 궁시렁거리기도 했지만,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중독이었다

그런 KINO가 차츰차츰 나오는 횟수도 띠덤띠덤하더니
결국엔 폐간에 이르렀다
앞으로 nKino.com에서 만나자면서,다시 또 만날날을 기약하면서,,,,
그렇게 KINO도 떠나버리더니..
nKino마저 이제 문을 닫는다고 한다
뭔가 업데잇이 없다 싶더니....
들어가보니 6월 25일자로 폐쇄시켜 버린다나 뭐라나....

이렇게 세상이 변화고 그에 맞춰 추억거리 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이젠 자주 꺼내볼 일도 없는..책장 한줄 가득차 있는 KINO들..

시간 내서 헌책방에나 한번 들러봐야 겠다...




KINO 연구

본 연구논문은 월간 COREA 창간호(2004년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월간 COREA 창간호를 필요로 하시는 연구자는 본 편집팀으로 문의해 주기 바랍니다. 월간 COREA은 국제영화전문 인터넷언론으로 거듭나 2007년 현재도 여전히 인터내셔널필름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전문 영화평론 시대를 이끌었던 KINO에 경의를 표하며!


▶홈페이지http://www.ncorea.co.kr 혹은 http://www.internationalfilm21.com



<목차>

1. 이남 영화지의 일대 비약 - 『KINO』의 역사 

2. 독특한 영화지, 독특한 수치

3. 작가주의의 역설 - 『KINO』의 성격

4. 『KINO』가 이룬 꿈, 『KINO』가 남긴 것

5. 『KINO』와 『COREA』의 변증법



 



1. 이남 영화지의 일대 비약

- 『KINO』의 역사 


1995년, 그 역사적인 전환점


『KINO』는 왜 1995년에 창간되었을까. 우선 1995년은 영화가 만들어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영화계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국내에 개봉되고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인기를 누릴 때이다. 그리고 촌스러운 멜로물을 밀어내고 386이라는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새로운 영화들이 속속 탄생할 때이다. 오랜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에서 벗어난 이남사회에서는 새로운 영화평론에 대한 담론이 생성되고 있었다. 『KINO』 창간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영화의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가 처음으로 상영될 때, 영화가 제7의 예술이라 불리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영화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에서 고전적인 편집의 틀이 완성되고 독일의 표현주의와 소련의 몽타주, 프랑스의 아방가르드를 경험하며 무성영화시절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였다. 1920년대 중반 유성영화가 시작되고 영화는 대기업화된 미국, 심리묘사가 뛰어난 프랑스, 기록영화가 자리잡은 영국에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의 신사실주의, 헐리우드의 사실주의가 풍미하게 되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의 베니스영화제 수상(1950)을 계기로 아시아 영화가 세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1960년대 세계영화를 영국의 프리시네마, 프랑스의 새로운 물결(누벨바그)로 설명한다면 1970년대는 신미국영화, 신이탈리아영화, 신독일영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주류인 동유럽에서는 타르코프스키의 등장으로 알 수 있듯이 일탈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는 헐리우드 영화의 침체를 틈타고 제3세계 영화가 크게 성장한 시절이기도 하다. 1980년대 뉴이미지 영화의 등장은 유럽, 미국, 아시아를 가리지 않았으며 이 무렵 홍콩의 스타시스템이 구축되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타란티노식의 유희가 범람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상영은 1897년10월 상순경 북촌 진고개의 어느 허름한 중국인 바라크 속에서 이루어졌다.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제식민지 시기와 미군정, 전쟁 시기에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던 영화는 1960년대에 들어서야 기지개를 폈다. 김기영, 유현목, 신상옥, 김수용, 이만희 등의 감독들이 활동이 눈부셨던 이 시기에는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어서고 있었다.


1970년대 유신시절의 이남영화는 저질시비에 시달리며 <겨울여자>,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 정도의 성과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임권택, 배용균 감독, 강수연의 해외 수상 등을 계기로 한 단계 도약하기 시작하였다. 6월항쟁의 성과를 일부 흡수한 영화계는 1990년대들어 독립영화, 기록영화계의 질적 발전을 경험하고 스크린쿼터 사수, 검열 철폐 등의 결실을 이루어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영화 100주년을 맞는 1995년은 바야흐로 이남영화계의 새로운 전환과 중흥을 예고하는 무엇인가가 터져나올만한 시기였다.



영화담론을 위한 영화지가 탄생하기까지


영화발전에 발맞추어 영화잡지도 발전한다. 권위 있는 영화잡지로는 『까이에 뒤 씨네마』, 『빌리지보이스』, 『EW』, 『스튜디오』, 『타임』, 『프리미어』, 『키네마준보』, 『전영쌍주간』, 『포지티브』,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이 인정을 받고 있는데, 이 중 『까이에 뒤 씨네마』가 『KINO』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KINO』가 창간에서 폐간까지 가장 많은 기사를 공유하고 혁신호를 내면서 그 방향을 시사 받았다고 고백한 잡지가 바로 『까이에 뒤 씨네마』였다.


『KINO』가 나오기 전에도 수많은 영화지들이 명멸하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10여종의 영화지가 있었고 1989년 언론자유화조치 이후에는 부정기간행물까지 합쳐 20여종의 영화지가 존재했다. 1979년 언론통폐합조치 전까지 있었던 영화지 중 『신영화』, 『영화세계』, 『코리아 씨네마』, 『실버스크린』, 『국제영화』, 『영화잡지』, 『영화』등이 주목할 만한 하다. 이들 잡지에게 이남영화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영화의 산업화를 요구하는 논고들이 종종 실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영화지들은 유명배우들의 화보와 영화에 대한 기초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990년대 초반의 영화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중적 영화지인 『스크린』이 1984년에 창간되었고 6월항쟁이 승리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수많은 영화지들이 창간, 복간되었다. 『씨네마』, 『영화잡지』, 『영화소식』, 『영화다이제스트』, 『영화연예』, 『로드쇼』, 『영화펀치』, 『영화예술』, 『다이나믹 영화』, 『영화저널』 등이 그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영화지들이다. 영화지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영화가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영화지들의 내용이 여배우의 사진으로 채워졌다는 점에서 영화지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 몇몇 영화지는 선정적인 화보들로 말미암아 정간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척박한 영화지의 세계에 새로운 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1980년대 진보운동의 주역 중 일부가 1990년대 들어 새로운 무기로 영화를 선택하였다.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을 촉진하고자 했던 이들의 진지하고도 적극적인 노력은 특히 영화평론의 영역에서 빛을 발하였다. 영화와 사회의 변증법적 연관에 주목한 이들은 영화평론의 역할을 중시하였고 1990년대 초 ‘한국영화위기론’이 대두되면서 이들의 문제제기는 본격화되었다. 영화에 대한 과학적인 비평으로 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영화적 실천에 새 흐름을 형성하려던 이들의 노력은 결국 새로운 잡지의 탄생으로 꽃을 피웠다. 『KINO』는 이런 흐름 속에서 창간되었다.



보편적 진보 안에서의 영화 다루기『씨네21』


『씨네21』은『KINO』와 같은시기에 창간되었다. 『씨네21』역시 1980년대 영화운동세대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영화지이다.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역시 언론의 몫’이라는 창간사에서 드러나듯이 『씨네21』은 문화의 대중적 확산과 대중문화의 활용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편 『KINO』와 『씨네21』의 가장 큰 차이점은, 『KINO』가 선별적이고 전문적인 영화평론으로 승부하려 한 반면, 『씨네21』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만큼의 진보적 시각으로 영화와 영상을 다루려 했다는 것이다. 『씨네21』은 『한겨레신문』의 응원이 있었다고 해도, 영화주간지의 생명력에서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



스스로가 100년을 기다려온 잡지


‘영화의 지나간 100년, 키노의 새로운 101년’. 영화의 100년 역사를 이어서 『KINO』가 새로운 100년 역사를 쓰겠다는 이 야심만만한 문구는 창간호의 ‘EDITORIAL’(사설) 제목이다. 『KINO』는 이 글을 통해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시하는 한편 영화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현실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KINO』는 종종 영화의 새로운 100년을 개척하기 위해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는 척박한 영화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을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KINO』가 자신의 탄생을 알렸던 광고문구는 ‘100년을 기다려온 그 잡지가 온다’였다. 지난 100년을 총화하고 새로운 100년을 예비한다는 『KINO』의 입장에서 영화탄생 101년째인 1995년은 천재일우의 창간년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영화지 창간을 주도한 주체들에게는 창간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100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국 100년을 기다려온 것은 그 누구보다도 『KINO』 자신이었으며 그러하기에 새로운 100년을 개척하겠다는 열정에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100년을 기다려왔다는 잡지답게 『KINO』는 순식간에 이남의 대표적인 영화지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진지한 작가주의와 선도적인 영향력으로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였으며 『KINO』와 독자들의 유대감은 여타 잡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공고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00년을 벼르었던 기개와 포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은 99호에 접어야 했다. 100년을 버티기에는 이남의 자본주의현실이 너무나 잔인했으며 아군과 우군의 역량이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영화를 위한 잡지, 변화를 위한 잡지


『KINO』가 영화를 위해 태어나, 영화를 위해 살다가, 영화를 위해 사라졌다면 과언일까. 『KINO』가 가진 한계와 실패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KINO』가 불태웠던 열정과 순수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KINO』는 영화가 상품이 아니라 예술임을 일깨우며 영화지의 새로운 표상을 제시하였다. 상업적 성패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KINO』에 대해 가슴저리며 회고하게 만드는 『KINO』의 매력과 성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화를 예술작품 그 자체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영화를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관점과 예술작품으로 보는 관점은 『KINO』와 다른 영화지들 간의 메꿀 수 없는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같은 시기 창간된 『씨네21』과의 관계는 다른 차원에서 고려해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씨네21』이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영화평론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KINO』는 독특할 수밖에 없다. 『KINO』의 이런 독특한 관점은 작가주의에 대한 옹호와 예찬으로 외화되었다.


『KINO』의 새로운 점은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영화평론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예술로 인식함으로써 각종 인문사회과학이론이 영화에 그대로 적용되게 되었다. 이는 『KINO』가 영화평론을 영화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다리로 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된 영화지임을 확인시켜주는 점이기도 하다. 단순한 영화 비평과 분석을 넘어 사회와의 연관에서 각각의 영화를 평론하는 영화지의 출현은 새로운 영화담론을 갈망하던 독자들의 마음을 이내 사로잡았다.


『KINO』의 남다른 점은 정성일편집장이 ‘영화를 통한 문화의 정치투쟁’이라고 표현하였던 노선에도 있다. 『KINO』는 영화를 평론할 때에 영화와 사회 간의 긴장관계를 늘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KINO』의 탄생배경이 영화운동에 잇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화를 압박하는 사회에 대한 영화인들의 투쟁을 선동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KINO』는 그간 영화지들이 돌아보지 못했던 제3세계영화, 아시아영화, 퀴어영화, 독립영화 등을 장막 밖으로 꺼내놓았다. 『KINO』의 새로운 시선은 할리우드영화의 비율이 절대적이었던 이남영화계에 만만치 않은 충격파를 던졌다.




2. 독특한 영화지, 독특한 수치 



작가주의 영화에 무한한 경의를 표하다


숫자는 때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가령 『KINO』와 관련된 다양한 통계는 『KINO』가 추구한 목표와『KINO』가 겪었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99권의 『KINO』 안에 숨겨진 숫자를 통해 『KINO』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해 보자.


우선 『KINO』가 다룬 영화 통계이다. 『KINO』가 다룬 총 영화수는 2038편(반복편수 제외)이다. 구체적으로 6회 2편, 5회 8편, 4회 31편, 3회 129편, 2회 349편, 1회 1522편이다. 이 중 통계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되는 2회 이상 다루어진 영화들의 경향을 분석해보자.


작가주의 경향을 포함한 이른바 ‘예술영화’들의 비율은 약 31%로 집계된다.(‘약’은 영화에 대한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한 표현이다.) 진보적 경향의 영화들, 즉 비판적 사실주의나 진보적 사실주의에 속하는 영화들은 전체의 11%에 그쳤다. 상업영화가 58%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만들어지는 영화들 자체가 상업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KINO』에는 해외영화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국내영화는 2회 이상 다루어진 519편 중에서 140편에 그쳤다. 이는 감독통계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 국내영화에 속한 감독의 숫자는 30여 명이다. 즉 선호하는 감독의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예술영화’의 빈도수는 84편으로 61%에 달한다. 이는 다루는 영화가 적은 탓도 있겠지만 국내영화일수록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KINO』가 중시한 영화들

6회 2편   <나쁜 영화>(장선우), <풍월>(첸 카이거)


5회 8편   <넘버3>(송능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 <씨클로>(트란 안 홍), <증오>(마티유 카소비츠), <체리향기>(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춘광사설 : 해피투게더 / 부에노스 아이레스>(왕가위), <타락천사>(왕가위), <타이타닉>(제임스 카메룬)


4회 31편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2>(변영주), <노틀담의 꼽추> (게리 트라우드 세일, 커크 와이즈), <다이하드3>(존 맥티어난), <데드 맨 워킹>(팀 로빈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마이크 피기스), <래리 플린트>(밀로스 포만), <맨 인 블랙>(배리 소넨필드), <멀홀랜드 드라이브>(데이빗 린치), <벨리>(하이프 윌리암스), <브레이킹 더 웨이브>(라스폰 트리에), <브로큰 애로우>(오우삼), <비밀과 거짓말>(마이크 리), <송어>(박종원), <스타쉽 트루퍼스>(폴 버호벤), <스타워즈>(조지 루카스), <안개 속의 풍경>(테오 앙겔로풀로스), <율리시즈의 시선>(테오 앙겔로풀로스), <이재수의 난>(박광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잃어버린 세계>(스티븐 스필버그), <자귀모>(이광훈), <저수지의 개들>(쿠엔틴 타란티노), <제5원소>(뤽베송), <캔사스 시티>(로버트 알트만), <크래쉬>(데이빗 크로넨버그), <토탈 이클립스>(아그네츠카 홀란드), <트레인스포팅>(대니 보일), <파고>(코엔 형제),<피아니스트>(미카엘 하네케), <헤라클라스>(론 클레멘츠, 존 머스커)


감독 통계


감독의 숫자는 주요평론(다씨에르)에 등장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하였다. 『KINO』에서 주요평론과 인터뷰에서 다룬 감독은 총 460명이고 2번 이상 다루어진 감독은 87명(기준: 주요평론에 등장한 횟수)이다. 그리고 전체 기사에 비해 한 호당 주요평론이나 인터뷰에서 다루는 감독이 5~10명으로 매우 적은 숫자를 차지한다. 이는 『KINO』가 제한된 숫자의 감독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요 평론에서 다루어진 우리 감독은 총 63명으로 전체 감독의 약 13.6%를 차지하고 있으며 2번 이상 다루어진 감독들 중 우리 감독의 비율은 20명으로 약 22.9%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해외감독의 숫자가 압도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KINO』가 주목한 우리 감독들


김유진, 박재호, 박철수, 송능한, 배경윤, 이정향, 이광모, 정지영, 임상수, 이재용, 김기덕, 강우석, 김홍준, 박현수, 장선우, 임권택, 홍상수, 장현수, 박광춘, 배창호, 박기형, 한지승, 최호, 허진호, 이서군, 문승욱, 정지우, 김희철, 이광훈, 김성수, 윤인호, 봉준호, 김지운, 변영주, 홍지은, 곽지균, 허승준, 유영식, 김기영, 김수용, 오승욱, 박종원, 김국형, 김상진, 이상인, 이명세, 민병천, 이광훈, 이창동, 박광수, 유상욱, 장진, 김의석, 김성홍, 이영재, 강제규, 심광진, 장훈, 박제현, 박찬욱, 곽경택, 정윤수, 김학모, 장준환



배우 통계


배우에 있어서는 영화, 감독과는 상반된 양상을 보인다. 『KINO』가 표지나 인터뷰로 실은 배우는 총 94명이다. 이 중 우리 배우는 64명으로 외국인배우보다 많았다. 이는 68%에 달하는 수치로 『KINO』에게는 색다른 경향이다. 물론 여기에는 배우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이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보인다.



영화제 통계


『KINO』는 전호를 통해 총 30여 개의 영화제를 소개하였다. 그중 깐느가 13번으로 16.25%라는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KINO』의 작가주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영화제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11.25%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인권영화제나 장애인영화제, 노동영화제 등 비상업영화제에 대하여 다룬 것은 주목할만하나 사실상 지면은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


영화이론 통계


『KINO』에서는 약 49회에 걸쳐 영화이론에 대해 다루었다. 철학적 바탕을 가진 이 영화이론들은 연재형식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KINO』는 프랑스 철학에 기반한 영화이론이 정신적 원천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앙드레 바쟁, 질 들뢰즈가 각기 8.16%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남 이론가들의 비율은 49명 중 13명으로 26%에 그쳐 『KINO』가 영화이론에서 해외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3. 작가주의의 역설

- 『KINO』의 성격


모더니즘과의 결별을 시도한 작가주의의 귀착점


『KINO』는 몇 번의 ‘EDITORIAL’을 통해 『KINO』의 ‘작은 원칙’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 ‘작은 원칙’이란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네아스트’(이는 ‘영화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로 감독이나 제작자를 가리킨다)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주의’원칙이다.(99년 1월호) 작가주의는 영화평론의 새로운 담론으로 부각되었으며 『KINO』를 전문영화지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지나치게 난해한 영화지로 비판받게 만들었다.


작가주의는 원래 문학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개념은 1954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까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한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에서 처음으로 영화에 적용되었다. 지지할 감독과 반대할 감독을 선언적으로 발표한 이 글은 프랑스 영화계 전역을 혼란과 논쟁 속으로 몰고 갔다. 작가주의란 ‘작가가 영화 속에서 어떤 특정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주의는 그 세계관이 표현되는 통로를 주제보다는 감독들이 사용한 기술이라고 주목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되는 것이 미장센(mise-en-scene)이다.


트뤼포의 작가주의가 보수화되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일갈이었던 점을 유념해볼 때 『KINO』가 작가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KINO』는 모더니즘 영화의 전통과 결별을 선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 있어서도모더니즘적 압박과 결별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들의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 『KINO』가 위기에 빠진 작가주의를 구하기 위해 들었던 구호는 ‘만국의 탄압받는 이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것이었다. 『KINO』는 작가주의를 통해 영화이론의 새 담론을 만들어냈고 영화를 통한 적극적인 현실개입을 지지한 프랑스 작가주의의 정신을 따라 이남 영화계를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작가주의와 모더니즘


작가주의


1954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까이에 뒤 씨네마』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에서 언급하면서 시작된 영화노선. 영화를 감독의 작품으로 이해하면서 영화에는 당연히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작품의 주제의식보다 형식적 측면이 중시되게 되었다. 작가주의는 ‘새로운 물결’(누벨 바그)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모더니즘


현대부르주아문예사조를 통틀어 이르는 개념이다. 19세기말 20세기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나라들의 자유주의적 시인, 평론가들,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상징주의, 주지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인상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등의 총칭이자 현대적 별칭이다. 사실주의문예사조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세상을 바꾸는 논리, 영화를 바꾸는 논리


『KINO』는 창간 1주년 기념호에서 「영화잡지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번역기사를 내보낸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연상되는 이 글에서 『KINO』는 영화지의 역할을 다시 한번 ‘변혁’으로 규정한다. 기사의 첫머리에 인용한 브레히트와 솔레르의 글귀는 『KINO』가 과연 어떠한 사명의식으로 영화지의 세계에 뛰어들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따라서 『KINO』가 밝히는 기록영화와 소수자를 위한 영하,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브레히트와 솔레르의 글귀


프롤레타리아는 지식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1.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깨부수는 것.

사적 유물론의 분쇄력 앞에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는 알몸을 드러냈다.

그 이념적 동조자들은 무력화됐고, 계급투쟁이 격화되었다.


2. 역사의 동인을 규명해 내는 것.

특히 비혁명적 상황에서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혁명적 지식인 계급뿐이다.


3.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순수이론을 도출해내는 것...


-B.브레히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문명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위기’다. 극점에 달한 이 양식은 점점 뚜렷하게 쇠퇴와 전복의 징후를 드러내게 되었다.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지금, 상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의미 양식의 근원적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다.


-필립 솔레르

정성일 초대편집장이 마찬가지로 창간 기념호에 발표한 「영화광들은 어떻게 세상과 싸우는가」에는 『KINO』의 이러한 목적이 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그가 ‘영화광’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넋두리와 잘난 체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그릇된 제도와 법, 논리에 맞선 투쟁이다. 하지만 이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수립한 평론의 기준이 작가주의였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KINO』가 선택한 작가주의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난해함과 선정성이 ‘영화광’은 열광시켰을지언정 대중과의 공유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논리와 영화를 바꾸는 논리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KINO』는 작가주의라는 전술을 선택했다. 『KINO』가 선택한 감독들 중 비판적 사실주의를 구현한 감독들도 있지만 뒤범벅된 형식의 차용과 섣부른 서사구조(내러티브)의 해체로 도저히 진보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도 많았다. 이는 1997년 5월호에서 선정한 11명의 씨네아스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작가주의가 내용보다는 형식을 강조하는 이론이므로 이러한 전술선택은 언제나 내용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이론의 기준에서도 벗어난다. 결국 『KINO』는 작가주의 담론의 딜레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주의 담론의 득과 실


『KINO』가 작가주의 담론을 선택함으로써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KINO』의 작가주의적 경향은 모더니즘 담론과 판에 박힌 헐리우드 영화에 신물이 나있던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KINO』가 주목한 기록영화, 독립영화, 제3세계영화, 아시아영화, 퀴어영화들은 그 동안 눈과 귀가 막혀있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영화의 지평을 보여주었다. 특히 『KINO』는 감독과 영화인의 인식수준을 변화시킴으로써 재능 있는 감독들이 객관조건에 타협하여 질 낮은 작품을 만드는 일을 어느 정도 방지하는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KINO』가 그대로 도입한서구의 작가주의 담론은 대중들에게 현실감있게 다가오지 못했고 『KINO』가 극찬해 마지않았던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를 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주제의식의 명확함보다 감독의 스타일과 기술에 치중한 서구 작가주의의 기준으로는 제한된 영화제작 시스템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국내 감독들을 고무, 격려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KINO』가 추구한 작가주의는 이남 평단이 추구하는 작가주의적 재해석론과도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KINO』의 작가주의는 갈수록 한계를 노정시켰다.


『KINO』의 작가주의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조건에서 대중과 현장과 평단으로부터의 고립은 『KINO』의 생존문제로까지 이어졌다.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자본주의논리에 저항하려는 『KINO』가 생존할 수있는 방법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뿐이다. 그러하기에 대중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여야 하는 작가주의적 경향은 기본적으로 광범한 대중들의 정서에 맞는 사조가 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난해한 이론과 용어들은 『KINO』를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결국 문을 닫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었다.


11명의 씨네아스트


로버트 알트만, 브라이언 드 팔마, 에릭 로메, 우디 알렌, 마틴 스콜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후샤오시엔, 데이빗 크로넨버그, 모리스 삐알라, 데이빗 린치, 스탠리 큐브릭




4. 『KINO』가 이룬 꿈, 『KINO』가 남긴 것

- 『KINO』의 성과와 한계


오직 영화만을 위한, 그러나 형이상학적이었던 담론


『KINO』가 영화사에, 영화지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KINO』로부터 불거진 수많은 논쟁은 영화평론과 영화지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안겨주었다. 『KINO』의 폐간위기와 관련되어서도 영화전문지 하나 살려둘 수 없는 우리의 척박한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정성일편집장이 ‘영화광이란 영화를 통해 철학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처럼 『KINO』는 철학과 인문사회과학이론을 통해 영화를 평론하는 새로운 영화지의 수준을 개척하였다. 『KINO』의 심층적인 영화분석 또한 영화정보지 수준에 그치는 다른 영화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KINO』는 자신이 선택한 감독의 작품을 요해하기 위해 인터뷰와 특집과 다씨에르, 리뷰를 단계적으로 동원하는 치밀함과 성실성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INO』가 더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역시 작가주의 경향이 가지는 한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유럽에서 이식된 생경한 작가주의는 독자들에게 생활적인 거리감을 주었는데, 『까이에 뒤 씨네마』, 『포지티브』, 『사이트 앤 사운드』의 번역기사가 30%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론적으로 뛰어날지 몰라도 해외 영화현실과 우리 영화현실이 엄연히 다른 조건에서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이야기지만 『KINO』가 다룬해외 감독과 국내 감독의 비율이 20 대 1에 달한다는 사실은 이남 영화현실을 개척하겠다는 『KINO』의 발언을 선언적으로 들리게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KINO』의 행보가 『까이에 뒤 씨네마』의 그것을 찍어낸 것 같이 동일한 상황에서 『KINO』가 과연 자신의 현실을 개척할 수 있는 적당한 담당자인가에 대한 논란은 피할 수 없었다.



고급스러운 형식, 난해한 체계


『KINO』의 형식은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두 시기 모두의 공통점은 평론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평론들과 특집, 인터뷰 등 굵직한 기획 외에는 지면을 극도로 아꼈다. 초기의 『KINO』에서는 화보중심의 취재기사도 종종 발견되지만 뒤로 갈수록 그러한 형식은 사라진다. 특히 혁신호를 통해 보여준 『KINO』의 잡지디자인은 그간 국내 영화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련미가 넘쳐난다. 평론지의 격에 맞는 형식의 창조는 『KINO』가 보다 대중적으로 거듭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외 유명 잡지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온 『KINO』의 형식은 사대주의, 교조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KINO』의 복잡한 체계의 기사들은 마치 난해한 작가주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몇 가지 실수가 덧붙여져 더욱 내용을 이해하기 까다롭게 만들었다. 『KINO』는 그 뛰어난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목차의 제목과 본문의 제목이 다르거나 하나의 기사제목을 수식하는 부제목들이 복잡했다. 필자를 표기하는 위치도 통일되어 있지 않거나 심지어 필자가 표시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언론으로서의 『KINO』의 형식적 한계는 안팎의 이유로 발행날짜를 정확히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재정문제와 집필, 편집 역량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분명 한계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잡지가 꼭 지켜야 할 대중과의 약속이기에 독자들의 신뢰에 금이 가게 한 이러한 한계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주간지가 점점 시장을 잠식하는 조건에서 월간지가 발행일을 준수하지 못하는 사실은 『KINO』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방법에서의 성과와 한계



『KINO』는 『nKINO』 이전에 인터넷 사이트를 가지고 있었다. 1996년 2월호에 소개된 ‘http:cezanne.daum.co.kr/cynema’가 그것이다. 지금은 『nKINO』에 가려져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KINO』는 1995년 8월호에 추천사이트를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KINO』는 주어진 것에 대한 해석과 검색이 아니라 직접 상업주의와 서구중심 정보의 포화를 뚫고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독자들의 호응(피드백)을 기대한 이 시도는 평가할 만한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정기독자를 중심으로 한 『KINO』의 판매전략도 안정적인 재정기반 구축과 관련해서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기독자들은 재정만이 아니라 『KINO』의 홍보자, 전파자의 역할을 하였다. 『KINO』의 폐간 소식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방불케 했던 정기독자들의 반응은 『KINO』의 정기독자가 다른 잡지의 정기독자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강고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발행사와 『KINO』 편집부의 이원적 운영은 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노선갈등을 낳았다. 재정을 책임지는 사람과 내용을 책임지는 사람의 동지의식은 잡지의 승패의 좌우하는 근본요인의 하나이다. 『KINO』의 노선을 바꾸느니 폐간하는 것이 나았다고 한 이연호편집장의 토로는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준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잠식해 들어갔다는 지적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다시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오프라인의 월간지가 온라인 잡지와 상호보완하는 방법을 적절히 찾지 못하는 것이 한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담당하는 영역이 엄연히 다른 만큼 단순히 온라인 때문에 오프라인이 쇠망의 길의 걸었다는 것은 충분한 원인 분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경영진의 방침이 온라인 중심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분석이 될 것이다. 『nKINO』가 『KINO』 편집진들이 소통을 비롯한 오프라인 잡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온라인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5. 『KINO』와 『COREA』의 변증법

- 『KINO』의 계승, 혁신



진보적 사실주의, 시대와 민중의 요구


『KINO』는 영화와 시대의 관계를 나름대로 진지하게 성찰한 영화지였다. 『KINO』는 누차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KINO』는 이 목적을 충실한 영화평론으로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KINO』가 강조한 영화와 사회, 영화와 시대의 관계는 새로운 영화지 『COREA』가 무엇보다도 계승하여야 할 역사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COREA』는 동시에 『KINO』와는 다른 전략을 수립하려고 한다. 『KINO』가 독자들에게 선전한 전략이 작가주의라면 『COREA』가 독자들에게 선전하려는 전략은 바로 진보적 사실주의이다. 진보적 사실주의는 진보적 민주주의론과 사실주의창작방법론을 이론실천적 방법론으로 하는 새로운 노선이다. 『COREA』는 『KINO』에 내포된,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은 진보적인 사상관점을 21세기 코리아(COREA)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구현하고자 한다.


『KINO』는 종종 해외기고글과 기사를 통해 사실주의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곤 했다. 진보적 1980년대의 성과를 이어가면서도 복잡한 1990년대의 난관을 돌파하는데서 『KINO』는 매우 힘들어했다. 『KINO』는 분명 생활의 본질과 시대정신을 형상하는 것이 모진 세상을 향한 강력한 일갈로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맑스레닌주의가 유행처럼 지나가고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되는 조건에서 사실주의가 영화와 세상을 구할 것이란 체계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


『COREA』는 진보적 사실주의가 영화와 세상을 구할 것이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가깝게는 지난 10년, 멀게는 20세기의 진보운동을 사상이론적으로 총화하고 있는 청년연구집단이 만들어가는 『COREA』는 갈수록 진리의 빛을 발할 것이라 확신한다. 작가주의가 처음부터 갖고 있지 못한 건설의 대안을 『COREA』는 진보적 사실주의의 토대 위에서 튼튼히 올려세우려고 한다. 『COREA』는 영화경력의 부족함을 영화인, 독자와의 굳건한 연대활동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진로를 앞장서 개척해 나아갈 것이다.



영화와 시사의 만남, 영화지발전의 합법칙성


영화는 문화이며 문화는 사회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사회의 또 다른 부분인 정치,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시대를 반영하는 영화가 시사를 만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화와 시사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순수예술’을 주장하는 것과 본질상 차이가 없다. 『KINO』가 그토록 전투적으로 검열과 싸우고 직배시스템, 스크린쿼터와 싸운 것은 『KINO』가 영화와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COREA』는 『KINO』가 달성한 고지에서 일보 더 전진하려고 한다.


영화는 영화계의 현실만이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 현실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이 영화도 정치적 사건과 변화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는 영화지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1970년대의 반동적 문화정책이 영화지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었고 1980년대 격동적 사회현실이 그이후 영화지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남북 간에 6.15공동선언이 합의되고 민족공조가 실현되며 반미의 무풍지대가 열풍지대로 전환되는 21세기 코리아의 정세는 영화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노동자, 농민의 대표가 국회에 진출하는 진보정당의 시대이고 진보개혁세력이 수구보수세력을 압도하고 있는 진보개혁의 시대이다. 진보와 자주의 시대정신이 구현된 진보적 민주주의, 진보적 사실주의의 마이크를 들고 영화와 시사, 영화와 정치의 변증법을 설파하여야 할 시기인 것이다.


예술의 본령이 인간운명의 개척의 길을 형상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할 때, 우리 민족, 민중의 운명을 개척하는데서 예술 중의 예술이라고 하는 영화가 수행하여야 할 역할은 크다. 그리고 영화의 역할이 크면 클수록 영화의 앞길을 선도적으로 개척하여야 할 영화지의 역할도 큰 법이다. 시대와 정치가 격동적으로 변화하는 오늘 영화예술의 진두에서 『COREA』는 독자대중이 영화와 정치를 통일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주도하고 추동할 것이다.



『KINO』수고했다, 이제부턴 우리가 맡는다!


무슨 일이든 빈터에서 시작되는 법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COREA』는 『KINO』가 이룩한 성과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KINO』가 이남의 가열처절한 자본주의 전투장에서 창조해 낸 알토란같은 성과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심지어 『KINO』가 범했던 오류마저도 『COREA』에게는 소중하다.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인들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영화와 진실에 대한 순결한 지향이고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는 불같은 열정인 것이다. 『COREA』는 『KINO』의 사랑과 투지를 높이 평가하고 그대로 계승하고자 한다.


그리고 『COREA』는 『KINO』가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아니 영화예술인과 언론출판인, 그리고 이 세상의 진보와 자주를 바라는 모든 이의 꿈을 실현하는데 앞장서고자 한다. 『COREA』는 부족하나마 지난 준비과정의 연구를 통해 모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론을 찾아냈다. 진보적 사실주의론과 창간집단의 사상의지적 단결, 편집과 재정의 일원화, 온오프라인의 결합, 진보개혁영화인의 연대 등이 그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새로운 영화지에 동의하는 견결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의 지혜와 힘으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아갈 것이다.


『COREA』에게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 재정도 집필진도 기술진도 모두 부족하다. 그래서 영화전문인들이 오랫동안 준비하고 추진해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을 비영화전문인들이 짧은 시간의 준비로 쉽게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족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굴러갈 수 있는 자체의 동력이 있으며 시련과 난관에도 굴하지 않을 사상의지적 담보가 있다. 우리는 사람의 힘, 사상의 힘으로 진보적인 영화지건설의 앞으로 닥쳐올 숱한 우여곡절을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한다.


『COREA』의 창간선언은 엄숙하고 비장한 선서가 아니라 영화지의 새 시대를 알리는 발랄하고 즐거운 노래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전개될 『COREA』의 공격은 『KINO』를 괴롭힌 자본주의시장에 대한 통쾌한 복수극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슴 설레는 전투는 실망과 피로로 잠시 자리를 떠난 영화인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새로운 투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양산할 것이다. 그동안 열악한 조건과 일부의 몰이해, 그리고 필연적 시행착오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KINO』의 전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KINO』 수고했다, 이제부턴 우리가 맡는다. (2004년 8월)


끝.

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internationalfilm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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